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관계 (문단 편집) ===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과 전쟁을 치루며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킵차크 칸국에서 갈라져나온 [[크림 칸국]]을 지원하였는데 이 크림 칸국은 전열을 가다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 특히 우크라이나 일대를 집중적으로 약탈하게 된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약탈은 일반적인 약탈이 아닌 초토화 작전을 동반한 노예 사냥으로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 지대가 크림 칸국의 약탈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무인지대로 전락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확장은 전투력이나 기술력의 우위보다는 정치적인 전략을 잘 활용했던 바가 더 컸기에 크림 타타르인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하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상실한 공백지 영토에 슬라브계 탈주 농노들이 자치 공동체를 구성하며 반농반목 생활을 하고 자력으로 크림 타타르의 공격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일대를 방어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코사크]]이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크림 칸국의 공격 및 [[모스크바 공국]]의 공격으로 점점 영토를 상실하고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동의하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크라이나 현지 지주들 역시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폴란드인과 동화된다. 루블린 조약 직전에는 폴란드 왕국 측에서 연방제 통일을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압박할 목적으로 우크라이나 일대의 리투아니아계 귀족들을 축출하였고 한 때 상당부분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방은 연방 내 폴란드 왕국 영토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지역 중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로 잔류한 지역은 베레스테이스크 지역과 [[핀스크]] 지역 두 곳 뿐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입지가 축소되자 여기에 반발한 리투아니아 귀족들 및 시민 중 상당수는 [[칼뱅파]] 혹은 [[유니테리언]] 교회로 개종하였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데, 가톨릭은 폴란드인을 상징하는 종파였고, 루터교회는 독일인을 상징하는 종파였으며, 정교회는 루테니아인들을 상징하는 종파였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별개의 종파를 믿어 자신들을 별개의 리투아니아인으로 구분짓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상술한대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우크라이나 일대로 영토를 급격히 확장하던 14~15세기 당시 리투아니아 측은 "우리는 새 것을 들여오지도 않고, 옛 것을 바꾸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며 현지 기득권층을 안정시켰고, 종교로 인한 갈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의 대귀족들 그리고 루테니아의 기득권층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화하면서, 정교회를 고수하는 여타 루테니아 농노들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서 참조] 폴란드 대귀족들과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도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대봉기라는 형태로 폭발하였다. [[흐멜니츠키 대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흔들리는 사이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왕국]]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방을 공격하였다.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 상당수가 루스 차르국 측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리투아니아 대귀족들, 특히 [[칼뱅파]]나 [[유니테리언]]을 믿는 귀족들이 과거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상실한 영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1655년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 측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스웨덴 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유니테리언들의 권익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었고, 이들을 그저 괴이한 이단 정도로 여겼다. 여기에 실망한 유니테리언 귀족들은 유리 네미리치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코사크 측에 접근하였고, 결국 1657년 유리 네미리치는 코사크 헤트만국으로 이주를 결정하였다. 스웨덴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폴란드의 가톨릭교도들이 스웨덴 왕국의 가톨릭 성당 약탈에 분개하여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폴란드 각지에서 스웨덴군을 쳐부수는 사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 시도마저 좌절되었고 스웨덴 측에 투항했던 폴란드 내 개신교도들은 매국노로 찍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유리 네미리치를 비롯한 상당수의 리투아니아인 유니테리언들은 생존을 위해 [[정교회]]로 종교를 갈아타버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까지 몰렸다. 결국 스웨덴에 투항했었던 리투아니아인 개신교도 + 유니테리언 귀족들을 중심으로 코사크 헤트만국을 [[루테니아]] [[대공국]]으로 승격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담은 하디아크 조약이 1658년부로 체결되었다. 그러나 루테니아의 코사크들을 지원하던 루스 차르국은 기껏 자신들이 침 발라 놓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이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돌아가는 것을 순순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루스 차르국 측은 자신들이 정교회를 믿는 코사크들을 보호해주는 진정한 정교회의 보호자라며 다른 코사크들을 선동하며, 1859년부로 유리 네미리치를 죽이고 하디아크 조약을 파토내버렸다. 이로서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 연방 시도는 좌절되고 키예프와 그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모두 루스 차르국의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상실한 것을 계기로 국력에 막대한 타격을 받고 결국 18세기 말에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중세부터 프로이센이 장악한 리투아니아 마이너([[쾨니히스베르크]] 일대) 및 오스트리아가 장악한 [[갈리치아]] 지방 제외] 리투아니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상으로 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는 상당히 가혹했던 편이었고, 오늘날 양국은 종교 차이를 떠나서 당시 러시아 제국 통치에 대한 역사적 반감을 공유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